1927년 초여름, 진주 촉석루 인근 남강에 강을 가로지르는 긴 철골 구조의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가 그날 처음 사람의 무게를 받아냈다. 구경하려는 인파가 강변을 가득 메웠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시절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내년이면 '진주교'라는 이름이 태어난 지 100년을 맞는다. 경남일보는 오늘부터 '경남의 첫 번째'를 연재한다. 경남이 만들어낸 여러 '처음'들을 되짚어보는 지면이다. 첫 회는 다리다.
다리는 시대를 가장 정직하게 담아내는 구조물이다. 진주교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경남 곳곳에서 '최초'라는 이름을 단 다리들이 태어났다.
◇도청 내주고 얻은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
진주는 통일신라 9주5소경의 설치와 함께 고려, 조선을 거치는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부지방의 중심도시였다.
1924년 12월 8일, 일제는 총독부령 제76호로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을 당시 경남에 속했던 부산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항만 확충으로 부산이 식민지 조선의 교통·물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
일제는 그동안 여러 차례 도청 이전을 타진했다가 주민 반발에 물러선 전례가 있었다. 이번엔 달랐다. 철야 농성과 시장 철시, 대규모 집회 등이 이어졌지만 소용 없었다. 1925년 4월 1일, 도청은 결국 부산으로 넘어갔다.
반발이 가라앉지 않자 총독부는 그해 6월, 남강치수사업과 천전리 일대 개발을 약속했다. 그 중심에 남강 가교, 지금의 진주교가 있었다.
사실 이 다리는 진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원하던 것이었다. 일제강.기 당시 진주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쓴 '진주대관(晉州大觀)'에는 남강 범람 피해로 주민들이 가교 건설을 수차례 탄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막대한 공사비(진주대관 기록, 60만~70만 원)가 들어 불가능하다던 일제는, 도청이 부산으로 넘어가는 순간 태도를 바꿔 건설을 전격 결정했다.
공사는 서울(당시 경성)에 본거지를 둔 일본계 토목회사 나가토구미(長門組)가 맡았다. 착공은 1925년 9월 2일, 준공은 1927년 5월 15일로 1년 8개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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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철도의 낙동강 철교는 있었지만, 그건 기찻길이었을 뿐이다. 사람이 건너는 인도교로는 진주교가 경남 최초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강호광 사료조사위원은 "당시 진주교는 평양 대동강교나 서울 인도교보다도 튼튼한 구조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공사비는 26만여 원으로, 당초 예상 금액의 절반도 안 됐다.
준공식은 보름 가까이 지난 5월 28~29일 이틀에 걸쳐 열렸다. 강 위로 콘크리트 상판이 처음 이어진 다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궁도대회와 기생들의 가무대회도 열렸다. 진주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일제로서는 놓칠 수 없는 자리였다.
'진주대관'은 이날을 '들끓는 환희'로 기록했다. 그전까지 남강을 건너려면 나룻배나 배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오늘날 진주 남강유등축제의 임시 다리가 이 배다리를 재현한 것이다. 진주교는 달랐다. 철골과 콘크리트로 강바닥에 뿌리를 박으면서, 임시 구조물의 시대가 그렇게 끝났다.
강호광 위원은 이렇게 짚었다. "총독부가 도청을 이전하면서 들끓었던 진주 민심을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 수단으로 다리가 놓였다는 。에서는 아쉬운 구석이 있는 시설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남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현대식 철골 구조 다리가 내년 준공 100년을 맞아 이런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됩니다."
1980년 11월, 진주교에서 약간 떨어진 하류 쪽에서 새 다리 공사가 시작됐다. 진주교는 그렇게 1983년 6월, 총 연장 272.75m, 왕복 4차로 다리로 다시 태어났다. 몸은 바뀌었지만 이름은 남았다. 내년 백수를 맞는 것은 그 이름이다.
남해대교
◇일본 자본·기술로 지은 다리, 우리 손으로 다시
'최초' 뒤에 곡절이 있는 건 진주교만이 아니다. 1973년 6월 22일, 대한민국 최초의 현수교가 개통했다. 남해군 설천면과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남해대교다.
현수교는 양쪽 주탑 사이로 굵은 케이블을 늘어뜨리고, 거기서 다리 상판을 매다는 방식이다. 케이블 양 끝은 땅에 박힌 거대한 구조물, 앵커리지에 고정된다.
다리 아래는 노량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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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곳이다. 공교롭게도 이 다리를 놓은 돈의 상당 부분은 일본에서 나왔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식민지배 피해의 대가 성격으로 받은 대일청구자금이었다.
주탑과 케이블, 앵커리지 강재까지 자재의 상당 부분은 일본산이었다. 전체 길이 660m, 이 다리 하나가 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나룻배로 노량 물살을 건너던 섬 주민들 눈앞에, 하늘에 매달린 거대한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1973년 6월 22일 개통식 당일, 현장에는 무려 10만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을 만큼, 이 개통식은 지방에서 개최된 행사 중 역대급 규모를 자랑했다. 그렇게 남해대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최고의 관광명소로 우뚝 섰다.
이전까지 농사와 어업에만 의존하며 고립되어 있던 남해는 다리가 놓이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다. 사람과 물류가 쉼 없이 오갔고, 섬은 비로소 육지와 하나로 연결된 역동적인 도시로 거듭났다.
남해대교
반세기가 지났다.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2018년 9월, 남해대교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순수 우리 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다리가 새로 놓였다. 노량대교다. 주탑이 V자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즐겨 쓰던 진법 학익진에서 따온 모양으로 학이 날개를 편 모습을 형상화했다.
다리를 설계한 기술진은 케이블 배치부터 새로 짰다. 두 주탑을 안쪽으로 기울이고 케이블을 3차원으로 배치한 경사주탑 방식은 노량대교가 세계 최초였다. 전체 연장은 990m, 최대경간은 890m로 이순신대교, 울산대교에 이어 국내 3위다. 주탑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 세웠다. 다리 아래가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맞닿은 청정 해역이기 때문이다.
노량대교 전경
노량대교 홍보관 전경
◇섬을 육지로 만든 다리
경남에 유독 '최초'라는 이름이 붙는 다리가 많은 이유는 단순하다. 섬이 많기 때문이다. 거제시만 해도 본섬을 포함해 유인도는 11개에다 크고작은 섬이 80여 개에 달한다. 노량해협과 견내량해협은 물살이 거칠고 수심이 깊어, 기존 공법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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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견내량해협에 교각을 세우는 공사가 시작됐다. 교각의 기초를 해저 아래 27m까지 박아야 했다. 이만한 깊이에 기초를 놓아본 전례가 국내에는 없었다. 물살이 거센 견내량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직전 왜선을 유인했던 그 바다이기도 했다. 실패하면 다리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1971년 4월 8일 오후 2시 18분, 마침내 거제대교가 완공됐다. 당시 경남일보는 1971년 4·27대선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자 3명을 개통식 현장에 급파해, 4월 10일자 지면에 '7억 들여 6년만에…거제대교 드디어 개통'이라는 제하의 기사와 '5천년 섬에 종지부…섬이여 안녕 환희의 팡파르'라는 제목으로 거제도민들과 통영, 고성 군민들의 반응을 실었다.
구 거제대교
개통식 날, 거제군민 4만 명과 통영·고성 주민 3만 명이 다리 앞으로 몰려나왔다. 섬 거제도는 그날 육지가 됐다. 옥포조선소와 죽도조선소가 잇따라 들어섰다. 지금 세계 최대 조선업 벨트로 불리는 거제 조선산업의 첫 단추가 이 다리였다.
부산에서 거제까지는 원래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번엔 다리 대신 터널을 택했다. 바닷속에 콘크리트 함체를 가라앉혀 잇는 침매터널, 국내 최초 시도였다. 네덜란드 기술진과 3년을 함께 작업했다.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길고, 수심 48m로 가장 깊은 터널이었다. 이 가운데 최고 깊이 기록은 2013년 튀르키예 마르마라이터널에, 최장 길이 기록은 2018년 중국 강주아오대교에 넘어갔지만, 세계 최초 외해 시공과 이중 지수제 함체접합 등 나머지 기록은 지금도 거가대교의 몫이다. 완공 당시 파도가 거센 외해 시공까지 포함해 다섯 가지 세계 최초 기록이 이 다리에 모여 기네스북에 올랐다.
기록은 숫자로 남았다. 변화는 삶으로 남았다. 2010년 개통 이후, 부산에서 거제까지 2시간 10분이던 이동 시간은 50분으로 줄었다.
진주교는 100년을 살았다. 노량대교는 이제 겨우 여덟 해다. 경남은 그렇게 계속 '최초'를 이어왔다. 진주교, 남해대교, 거가대교만이 아니다. 창선삼천포대교(2003), 마창대교(2008) 등 경남 곳곳에는 저마다 사연을 품은 또 다른 '최초'의 다리가 있다.
신 거제대교
신 거제대교
노량대교 홍보관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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