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바람만으로 모래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공조기 돌아가는 소리, 관객이 옷을 여미는 소리, 옆 사람과 속삭이는 소리가 뒤섞였다. 한글 자음과 알파벳이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다시 맞은편 천장으로 이어져 객석을 감쌌다. 15㎝ 높이의 낮은 원형 무대를 방석과 의자가 에워쌌고, 관객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거대한 설치미술의 일부가 됐다.
지난 3~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열린 컨템퍼러리 시즌 ‘싱크 넥스트(Sync Next) 26’의 개막작 ‘바람만으로 모래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무대 위 연주자뿐 아니라 공연장 안 모든 존재가 내는 소리를 재료로 삼은 무대였다. 싱크 넥스트는 세종문화회관이 2022년부터 매년 여름 블랙박스 극장 S씨어터에서 여는 컨템퍼러리 공연 플랫폼으로, 올해는 7월 3일부터 9월 5일까지 이어진다.
한국과 프랑스 예술가 6명이 참여한 이 작품은 한불수교 140주년을 맞아 두 나라의 소리를 잇는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사운드 아티스트 해미 클레멘세비츠(Remi Klemensiewicz)와 해금 연주자 김예지, 비올라 다모레 연주자 올리비에 마랭이 중심을 이루고 거문고(심은용), 정가(조윤영), 중세 성가(크리스티앙 플루아)가 합류했다. 이들은 이 작업을 ‘소닉 씨어터(Sonic Theater)’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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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예지는 공연에 앞서 열린 간담회에서 긴 제목을 두고 “모래바람 소리는 결국 모래와 바람이 만나야 나는 것으로, 모든 소리는 관계로부터 출발한다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바람만으로 모래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공연은 관객을 무대 안으로 끌어들였다. 연주자들은 객석 뒤를 오가며 소리를 냈고, 스피커를 옮겨 같은 소리를 여러 각도에서 듣게 했다. 중세 성가와 거문고·해금이 만나고, 정가가 비올라 다모레와 포개졌다. 숨소리, 공연장 벽과 바닥을 두드리고 긁는 소리, 조명이 켜지고 꺼지는 소리까지 겹쳐 쌓였다. 관객은 동서양의 옛 목소리와 자신이 앉은 공간의 소음이 얽히는 한가운데에 놓였다. 다섯 장으로 이뤄진 공연은 ‘태초의 목소리’에서 시작해 부딪히고, 마주하고, 숨을 들이고 내뱉는 소리를 거쳐 ‘함께 존재하는 소리’로 나아갔다. 마지막 장에서 모든 소리가 절정으로 치달았다가 숨을 고르며 끝났다.
악기는 악보를 따르는 대신 물성 자체를 드러냈다. 거문고는 술대로 뜯고 문지르고, ‘드르륵’ 가로로 긁고, 두드리고, 때로 바이올린처럼 활을 써서 소리를 냈다. 원형 객석 한가운데 놓인 십자 단상의 한 축 양 끝에 거문고와 드럼이, 다른 축 끝에 정가와 중세 성가 가창자가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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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바람만으로 모래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2013년부터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클레멘세비츠는 한국어와 프랑스어 모음의 미묘한 차이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아’ ‘이’는 두 언어가 거의 같지만 ‘으’ ‘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며 “모음의 지속적인 소리를 다루려면 정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그 맞은편에 중세 성가를 놓았다”고 했다. 그는 이질적인 요소를 매끄럽게 융합하기보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프랑스 마르세유 국립미술학교에서 석사를 마친 그는 화가였던 아버지가 1990년대 한국에서 전시를 열며 사 온 한글책과 전통음악 음반을 접하고 한국어에 호기심을 품었다. 원형 스피커를 자음 ‘ㅇ’으로 삼은 사운드 퍼포먼스 ‘OUI(위)-우이’(2022)에서 지속되는 소리 위에 악기 소리를 쌓았던 실험이 이번 공연으로 확장됐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아트선재센터·백남준아트센터 등에서 사운드·미디어 아트를 선보였고, 지난해 서울시무용단 ‘스피드’의 음악에 음악감독 황민왕과 공동으로 참여하는 등 무용계와도 협업해 왔다.
‘바람만으로 모래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공연 직후 세미 클레멘세비츠가 관객들과 대화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김예지에게 이번 작업은 해금의 고유성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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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예전에는 서양 악기와 협업할 때 첼로 음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농현과 시김새를 빼며 맞추려 했는데, 해외에 나가 보니 오히려 그것이 비올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목소리였다”고 했다. 그는 선율을 잇는 역할에 갇히지 않으려 해금을 두드리고 튕기고 긁는 ‘해체적 연주’를 시도했다. 김예지와 마랭은 2024년 미국 뉴욕의 예술 레지던시 아트 오미(Art Omi)에서 처음 만나 이 작업의 씨앗을 틔웠다.
마랭은 컨템퍼러리를 “동시대를 사는 것”으로 풀이했다. 그는 “여행과 교류가 쉬워진 시대에 아티스트는 다른 문화와 시간성의 교차。에서 과거와 현재, 동쪽과 서쪽을 잇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간을 악기로 삼다 보니 장소가 바뀔 때마다 공연은 달라졌다. 세종문화회관과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이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더 윈드 앤 샌드 투어-소닉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순회한다. 세종 공연에 앞서 6월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축약본을 선보였고, 7일에는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도 무대를 열었다. 김예지는 “옥상에 올라가 보니 광화문의 차량 소음이 위에서는 뭉게뭉게 하모니처럼 울린다”며 “그 소리를 살려 S씨어터와 대비되는 작업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 작품은 10월 1일 파리 기메 동양박물관, 10월 3일 런던 스톤네스트로 이어진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2026 코리아라운드 컬처’ 사업, 프랑스문화원의 예술확산지원 프로그램(PIDA) 지원을 받아 제작됐으며 주한프랑스대사관이 협력했다.
을 감쌌다. 15㎝